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야광석

야광석

오늘은 피치 못할 모임 때문에 로테에게 가지 못했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녀 가까이 있던 사람이라도 내 곁에 두고 싶어서 하인을 시켜 로테에게 다녀오라고 했다네.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하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하인을 맞았는지! 내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하인의 머리를 붙잡고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네.


야광석을 햇빛 아래 놓아두면 그 빛을 흡수해서 밤에도 한동안 빛을 발한다고 하네. 그 젊은 하인이 내게 그런 존재였네. 로테의 시선이 그의 얼굴과 뺨, 그의 윗옷의 단추와 외투의 깃에 닿았었다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성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네!


오렌지


















그런데 로테가 그 오렌지를 같은 자리의 별 볼 일 없는 여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는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네.


개요


1774년 독일의 문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소설. 음울했던 괴테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인데 대체로 서간체(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편집자의 간단한 서술인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초중반부는 주인공인 베르테르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쓴 편지를 순서대로 보여주는 형식으로 쓰여 있고, 후반부에선 편집자가 베르테르의 편지와 지인들에게 얻은 정보를 엮어 사건을 재구성하여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부분 괴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몇 가지의 묘사들은 샤를로테가 아닌 괴테의 다른 연인들과의 경험에서 따온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1부에서 7부까지는 괴테 자신의 이야기를, 그 이후부터는 신문에서 본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


제목


제목의 '베르테르'는 작중 주인공 남자의 이름인데, 독일어로는 베르터(Werther)라 하며 '베르테르'는 일본어를 중역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과거에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웨루테루(ウェルテル)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 학계에서도 원어 발음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한번 굳어진 것은 고치기 어렵기에 그대로 두고 있으며, 그나마 을유문화사와 창작과비평사 에서 이를 바꿔 보겠다고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슬픔이 아니라 고통, 고뇌인 이유는 독일어 원제 중 die Leiden(das Leid의 복수형)에서 슬픔이라는 의미는 일부이고, 고통이나 괴로움, 고뇌에 가깝기 때문이다.

줄거리

대부분이 주인공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 예술가인 주인공 베르테르는 어떤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아가씨 로테와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며 로테도 베르테르를 자신의 지적 감성과 성격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로테는 이미 임자가 있는 상태.

로테는 이후 약혼자 알베르트에게도 베르테르를 소개시켜 줘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게 하려는 등 나름대로 노력해 보지만, 알베르트와 베르테르는 성격도 다르고, 둘 사이에 로테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사이가 되기엔 애초에 힘들었다.

로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로테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낀 베르테르는 한동안 로테 곁을 떠나기로 하고 친구 빌헬름이 추천해 준 대로 공사의 비서로 일을 하는데, 남 밑에서 일하는 것도 적성에 안 맞는 데다 공사라는 사람의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고, 속물적인 귀족 사회에 신물이 나 약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낸다.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순례도 하고 전쟁터에도 나갈까 고민하는 등 로테를 잊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유일한 여인을 찾아 다시 되돌아오게 되고, 이후 로테의 남편인 알베르트에 대한 질투는 점점 커져만 간다. 로테 역시 베르테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동요하게 되고, 베르테르가 찾아온 뒤면 알베르트와의 관계가 불편해졌다. 나중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악감을 느끼고, 불만과 불쾌함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다. 로테에 대한 사랑을 체념한 베르테르는 죽음만이 그의 사랑을 완성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로테를 향한 마지막 사랑의 표현까지 거절당한 베르테르는 결국 알베르트에게서 빌려 온 권총을 이용해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로테는 그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실신했으며, 알베르트는 그녀의 목숨이 걱정되어 베르테르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알베르트, 로테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유언대로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 묻어주었다.

평가

248년 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감수성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다. 지금 읽어봐도 왜 베르테르 효과가 나왔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불륜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을 표할지 모른다. 실제로도 현대에서 이 작품을 리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플롯만 따지고 보면 막장 불륜 드라마 같다는 드립을 치는 사람들이 간혹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 소설이 몇 세기 전에 쓰여졌는지, 그리고 당시 문학의 주류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또한 막연히 짝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의 대립은 '감정'과 '이성'의 대립을 상징하며 넓게 보면 '개개인의 감성'과 '획일화된 집단'의 갈등을 상징한다.베르테르가 쓴 편지에도 짝사랑의 고단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속물스런 귀족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거나 출세 지향의 안일한 공직 사회에서 고통받는 모습과 함께 자연과 종교, 행복 등을 아우르는 철학적인 고민이 쓰여 있다.

처음 나올 당시에도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 왕족이든 귀족이든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읽어댔고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라는 평도 얻어냈다. 눈여겨볼 점은 알려진 것과 달리 괴테는 이 작품으로 그다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 출판사가 듣보잡 애송이 작가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 해적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큰 유명세를 떨쳤고 결국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 고위 귀족인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이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한다. 괴테는 3년간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돈은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원이 지겨워져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면서 공작을 속이기도 했다. 다만 공작은 괴테가 공무원을 지겨워한다는 걸 알고 글만 잘 쓴다면 그만큼 돈을 주고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등 잘 이해해 주었기에 비로소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이때 나이가 30대였으며 아우구스트 공작은 나중에 괴테를 친구같이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즉 이 소설 자체로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괴테를 유명하게 만들고 풍족하게 살게 만들어준 건 사실이다.

괴테와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이자 괴테를 존경하던 극작가 실러(1759~1805)는 16살 때 이 소설을 읽고 경악했다고 한다. 소설을 심리적으로 공감이 가게 만드는 이 괴테는 대체 누구냐고 감탄했는데, 5년 뒤에 자신이 살던 곳의 영주 명령으로 억지로 사관학교로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괴테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 영주인 오이겐 공작이 일개 평민에 불과한 젊은 나이의 괴테를 정중히 모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러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소설 하나 때문에 영지민들에게 가혹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던 영주가 스스로 몸을 낮추게 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회고하며 자신도 글을 쓰기로 마음먹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 실러가 괴테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러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실러는 탈영하여 멀리 달아나 어렵게 살면서 희곡과 글을 써 왔고 40대 가까이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테에게 찬양받으면서 대박을 거두고 그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으며 43살에 귀족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도 이 책을 가지고 다녔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16번을 읽고 또 읽었다. 심지어 이 책을 토대로 자작 소설까지 써봤지만 망했다고. 대불 동맹을 분쇄하고 독일을 점령한 나폴레옹이 드디어 괴테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다 좋은데 주인공이 귀족들로부터 창피당하는 장면은 내용에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며 태클을 걸었으나, 괴테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나폴레옹(그리고 그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은 본 소설을 단순히 연애소설로 보고 연애와는 아무 연관 없는 장면에 대해 그러한 조언을 한 것이겠으나 여러 주제를 담으려던 괴테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그 밖에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가 이 책을 사악한 책이라 비난하면서 20번도 넘게 읽었다고 회고했다. 이 영향으로 멀리 중국의 두 남녀가 그려진 도자기가 유럽에 팔리기도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결국 교황청에서도 금서로 지정했지만 해적판이 더욱 많이 나와 책을 더 유명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근대화 시대 동아시아에서 소개되었을 때 신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충격을 던진 작품이기도 하다. 마오둔이 미국의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질문한 것 중 하나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연애가 그저 문학가의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는 것이었을 정도. 이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시기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인 '개인의 발견' 과 관련이 있다. '충효'와 같은 가치관 이전에 개인과, 개인의 자유 및 감정이 있다는 근대 서구적 가치관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그런 '개인'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결혼과 같은 문제를 가문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는 '연애'였으며, 이 때문에 연애 소설들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자유연애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상징으로서 유행하게 된 것. 그런 상황에서 이 작품은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와, '개인의 욕망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을 완전히 저버린 인물'이 '에에잇! 저런 천하에 몹쓸 것! 소문날까 두려우니 시체일랑 거적에 싸 말아서 내다 버려라!'라는 욕을 먹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속의 애도 속에 묻히는 결말을 맞으며, 이런 이야기가 소설의 형태로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충격을 일으킨 것이다.